동화

지하털이 처음 개통되던 날

왕꼬장 2008. 9. 12. 20:37

                                                                         지하철이 처음 개통되던 날
                                           


"아빠, 아빠! 빨리요, 빨리."

 

민철이가 재촉을 합니다. 아빠와 엄마는 그런 민철이가 하는 재촉이 싫지 않은 듯 미소를 머금으며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가야 된단 말이에요."

 

오늘은 청계천 광장에서 환경보호 행사가 있는 날입니다. 민철이 아빠와 엄마는 행사 프로그램의 하나인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민철이와 함께 집을 나서고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을 타면 시청 앞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됩니다.

서울 시내 도심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민철이는 이렇게 어쩌다 한번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신이 나서 호들갑입니다.

 

"시내 가는 게 그렇게 좋아?"
"네. 좋아요. 재미나요. 맛있는 것도 먹고요."

전동차 안에서 민철이는 정작 신난다고 하더니 가져온 게임기를 조작하며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민철아, 그런 게임 하지 말고 아빠가 이 지하철에 얽힌 추억을 얘기해줄게. 잘 들어봐."

추억이라고 하자 엄마도 고개를 돌리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덜컹거리며 가는 전동차 안에서 아빠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민철이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 기차 개통된 아빠는 타려고 했단다."
"아, 첫날요? "
"그래."
"언제 만들어졌는데요?"
"아빠가 중학교 때."
"정말이요?"
"그럼. 그때 할아버지가 아빠를 데리고 시청까지 나오셨지."

중학교 1학년이었던 아빠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시청으로 나왔습니다. 여름방학 내내 독서실을 다니며 공부하느라고 변변하게 놀러가지 못 했던 아빠가 안됐는지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오늘 지하철도 개통됐다는데 한번 시내에 나가볼까?"

그래서 부자는 지하철을 타보기 위해 시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갔습니다. 개통하는 그날은 바로 8월 15일 광복절 날이기도 했습니다. 시청 앞에는 광복절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지하철 개통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대에 들떠 처음 개통하는 지하철을 타보려고 꾸역꾸역 시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배고파요."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는 시청 뒷골목의 냉면집에서 냉면을 사줬습니다. 처음으로 식당에서 파는 냉면을 먹어본 아빠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특히 계란 노른자위를 풀어서 먹으니 국물이 고소했습니다.

 

"맛있냐?"
"네."
"그럼 이제 지하철 한번 타러 가볼까?"

지하철을 타러 갔지만 시청 앞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모두 다 지하철을 타본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안되겠다. 영화나 한편 보고 타자."
"영화 좋아요."

아빠는 할아버지와 오래 줄을 서서 표를 산 뒤 영화를 보았습니다. <벙어리 삼룡이>라는 영화였습니다.
두어 시간 뒤 영화를 보고 나온 아빠와 할아버지는 다시 지하철을 타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까 오전보다 더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지하철은 나중에 타자. 오늘은 충분히 즐거웠지?"
"네."
그리하여 부자는 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피, 그게 전부예요?"

 

민철이가 말했습니다.

"그래. 할아버지하고 개통하는 날 시청역엘 왔었지."
"당신 혹시 그날 몰랐어요? 대통령 부인이 저격당한 거?"

 

옆에 있던 엄마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알지.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켜봤더니 난리가 났더라고."
"네? 대통령 부인이 왜요?"

 

민철이가 갑자기 관심을 보였습니다.

"북한에서 보낸 공산주의자에게 대통령 부인이 저격을 당했어. 그날이 광복절이어서 기념행사 하고 있었거든."
"저격이 뭐예요?"
"총 맞는 거. 그래서 돌아가셨어."
"와, 영화에 나오는 얘기 같아요."
"온 국민이 그때 얼마나 슬퍼했는데……."
"정말요?"
"막 통곡을 하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 부인을 떠나보내는 대통령의 슬픈 모습을 보고 다들 눈물을 흘렸어. 그래서 다들 그 8월 15일 지하철 개통하는 날에 대한 추억과 슬픈 사 연이 연결되어 있단다. 아빠는 특히 할아버지하고 시내에 나갔던 기억이 나지."
"그랬군요"

 

이야기하는 아빠의 눈시울도 뜨거워졌습니다.

"아빠는 왜 울어요? 대통령 부인이 돌아가셔서요?"
"아냐. 그때 그 철부지였던 내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아들을 데리고 이렇게 또 시내로 놀러가잖니? 세월이 참 너무 빠르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민철이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던 엄마가 아빠의 손을 꼭 쥐어주었습니다. 다음 번에 지하철을 타자고 했던 할아버지는 결국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하고 그해 겨울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여보, 그 대신 우리 민철이가 있잖아요. 당신도 우리 민철이한테 아버님이 해주지 못한 거 다해주면 되잖아요."
"응, 그래. 그러면 되지."
"어 벌써 다 왔다!"

 

민철이 말대로 전동차는 어느새 시청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통과 문방  (0) 2008.10.19
바다로 가는 기차  (0) 2008.09.24
후기인상파 작가들 외우기  (0) 2008.09.24
지름길이 느린 길  (0) 2008.09.14
자동차 없는 나라  (0) 2008.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