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인 강만수 시인의 수필

왕꼬장 2009. 5. 1. 16:46

 

지인 강만수 시인의 수필을 그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다. 

  

                                       나의 애장품  

 

 강 만 수 

 

필자는 애장품이란 것을 지녀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평소 필자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겨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을 굳이 꼽으라면 서가에 꽂혀 있는 만여 권의 장서가 아닐까 싶다.

 

그 책들 중에서도 오천여 권의 시집들일 것이다. 필자에겐 십대 초반부터 오십을 넘긴 현재까지 끊임없이 하고 있는 취미생활이 있다. 그것은 배낭을 메고 하는 헌책방 순례다. 필자 자신이 소년이었던 과거에는 현재처럼 인터넷같은 빠르고 간편한 실시간 지식 검색은 상상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은 모두 다 가난을 안고 살았기 때문에 원하는 새 책을 바로 구매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읽고 싶은 책이 서점에 신간으로 나오게 되면 필자는 책 제목을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 필자가 다니는 헌책방 주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런 뒤 원하는 책이 헌책방에 나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언제 나오게 될지도 모르는 새 책을 기다렸던 시간은 내겐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기다리다 원하던 책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란 말만으론 표현하기 힘들다. 그렇게 필자는 사십 년 전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식 욕구에 가슴이 허할 때면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헌책방 순례를 하고 있다.

 

먼저 전농동 전농 초등학교에서 시작해 길 건너 동대문 여중 뒤쪽 헌책방 골목을 훑는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 시간대나 마음먹고 나선 일요일 같은 경우는 종일토록 걷고 또 걸어서 면목동에서 제기동으로 다시 청계천 헌책방 골목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때론 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돈이 떨어져 점심을 굶은 채 마냥 헌책방에 들어가 선 채로 사상계와 현대문학 학원 잡지들을 읽다 나오곤 했다.

 

현재까지의 삶에서 필자는 큰 실수를 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저런 온갖 유혹으로부터 필자 자신을 지켜내고 올곧은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책 덕분이다. 자신을 발전시켜나가고 지켜나가는데 책을 통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그를 통한 인격 수양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쉽게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구하고 모든 것이 빠르고 편하게 전개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 사회는 실용성을 내세운 물신 만능주의 늪에 빠져 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도 그런 이유에서 나온 듯하다. 그저 빠르고 편한 것에 취해 대다수 사람들은 제 자신을 쉽게 던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학문의 길에는 왕도가 없다고"한 유클리드의 말처럼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게 된다는 뜻이리라.

 

필자 역시 오랜 시간 시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었던 것 같다. 필자 자신이 지금 애장품이라고 내보이는 이 장서들도 또한 그렇게 만나게 된 것들이다. 필자는 시를 쓰고 읽으며 누군가에게 직접 시를 배운 적이 없다. 그렇지만 어찌 스승이 없다고 할 것인가. 필자에게 깨우침을 주시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한 스승들은 모두 다 헌책방 순례 길에서 책을 통해 만나게 된 분들이다.

 

동성연애자에 외설적이며 반미적이라는 평판을 들었던 미국 시인 알렌 긴스버그의 시집 『아우성』은 전농동 헌책방에서 만났다. 스페인 남부 꽃의 도시라 불리는 세비야에서 태어난 빈센테 알레이산드레 시인의 『파괴 혹은 사랑』은 청계천에서, 청마 유치환 시인의 『미루나무와 남풍』은 면목동 책방에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는 모든 스승들을 필자는 이처럼 어둑신한 헌책방에서 만났다. 하나 둘씩 헌책방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필자가 언제까지 이런 헌책방 순례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그 순간까지는 계속해서 헌책방 순례를 하게 될 것 같다.

 

단 하나의 헌책방이 남게 된다고 해도 필자는 지식의 보물 창고인 헌책방 순례를 포기할 수 없다. 앞으로도 필자는 헌책방 순례를 통해 필자의 서재를 헌책 애장품으로 빼곡하게 채워 나갈 것이다./ 강만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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