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숙적 서평 - 하늘나라 여행객인 우리

왕꼬장 2008. 9. 12. 20:31

                                                        하느님 나라의 여행객인 우리-숙적

 

 

 


                                                                   

작가로 등단한 뒤 처음으로 쓰게 된 작품이 장편소설 <원균>(1994)이었다. 간신으로 알려져 있던 원균을 충신으로 재조명해 당시 화제가 된 이 작품을 준비하느라 수개월간 임진왜란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던 나는 최근에 일본판 <원균>이라 할 만한 <숙적>을 통해서 역사라는 동전의 뒷면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은 나의 <원균>과 동시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표적 가신이었던 가토오 키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라이벌 관계를 설정한 독특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잔인무도한 적장에 불과하지만 그들 둘은 입장이 판이한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다. 타고난 무장인 가토오와 상인 출신 고니시. 둘은 출신배경은 물론이고 종교에서까지 달랐다. 불교신자인 가토와 달리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기저에 깔려 있는 갈등은 천주교 신자로서 주인공 고니시가 느끼는 삶의 치열한 고뇌다.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신하지 못하여 면종복배(面從腹背)를 결심한 그. 결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주군인 그를 독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그런 그가 항상 모범으로 삼는 자는 우공이라는 또 다른 가신. 그는 천주교를 포기하든지 모든 기득권을 내놓으라는 도요토미의 말에 흔연히 자신의 영지와 백성들을 반납하고 신앙을 지킨다. 눈에 보이는 유한한 것 너머에 있는 진리이신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에 그 '결단'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럴 수 없는 고니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신앙을 숨기지만 겉으로는 가문과 추종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을 지키기 위해 배교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공과 다른 그의 삶은 이렇게 이중적이어서 더욱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사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아마도 나의 장애가 나를 그렇게 규정한 때문이리라. 장애인의 삶을 살며 운명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 치열한 노력으로 삶을 바꾸려는 의지가 내 안에 가득했으니까.

"인간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소위 운명이라고 하는 그것이다."

고니시가 인생을 마무리하며 한 말이다. 때로는 운명을 바꾸었다, 주어진 난관을 극복했다 생각하기도 하는 우리지만 결국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운명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것은 하느님 뜻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 감을 뜻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스스로 이루었다 여긴 것도, 이루지 못한 것도 모두 운명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저 우리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의 그날까지 살다가 가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을 내게 권한 소중한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만난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여행객일 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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