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지

왕꼬장 2008. 9. 16. 09:51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야, 너 왜 그 안내문 버리는 거야?"
갑작스런 내 질책에 술에 취한 동창 녀석은 찔끔해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놨다.
"다, 다 알았다구."
"알긴 뭘 알아? 통장 번호랑 거기에 다 있는데."

 

지난 해 말 송년 반창회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교에 장학금을 모아 전달하자는 취지를 담은 안내문을 한 녀석이 구겨버려 나는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내 수고가 무시당한 느낌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가까워오는데 나는 3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의 모임인 반창회를 이끌고 있다. 이끈다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고, 주소록과 회비 통장을 관리할 뿐이다. 물론 송년회 등으로 만날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는 것도 내 담당이다.

 

대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내성적이고 폐쇄적이어서 이런 모임에 소극적이다. 나오라고 해도 잘 안 나갈뿐더러 연락조차 안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성격이 그렇지 못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연락해서 작당하는 일이 좋으니 어쩔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쯤 있어야 어느 모임이든 운영되는 법이라고들 말하긴 한다.

 

우리 반창회는 현재 25명 정도가 연락이 되어 서로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자녀들이 이미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인데 고3 반창회의 맥을 아직도 잇고 있으니 참 특이하고 어찌보면 징그러운 모임이다.

 

하지만 우리 반창회가 처음부터 이렇게 활성화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뛰어들면서 각자 소그룹으로 모이거나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혼 초 살림집을 얻으려고 홍은동 부근 부동산소개소 앞을 아내와 함께 얼쩡거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 앞을 지나쳐간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저만치에서 후진을 했다. 그러더니 차에서 내린 사내가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바로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이미 결혼을 해 그 동네에서 살림을 차리고 있던 녀석의 집에 가 내외간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녀석이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서넛과 연락을 하며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나도 그런 친구들 서넛을 알고 있어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임을 합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물방울들이 모여 몸집을 불리듯 우리의 반창회 모임은 커져갔다.

 

모임이 커지는 것과 활성화는 분명 다른 문제다. 만남이 즐겁고, 자꾸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하기 때문인데 다행히 우리 모임을 주도하는 나는 이미 대학과 사회 생활에서 이런 모임 이끄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우선은 나처럼 사람 좋아하고 인맥관리를 즐겨하는 사람이 회장이나 연락책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즐거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시간 내서 전화기 버튼을 눌러 모임을 주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쁜 사람에게 이런 보직을 맡기면 십중팔구 그 조직은 와해된다. 연락이 없다보면 모임의 결속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모임을 너무 자주 가지면 안 된다. 어떤 모임은 한달에 한번, 혹은 두 달에 한번씩 날짜를 정하고 모인다고 한다. 물론 동호회 성격의 모임이라면 자주 모일수록 좋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공감대도 없는 그야말로 반창회일 뿐이다. 까까머리 시절 같은 반에서 옹기종기 1년을 보냈다는 사실 밖에는 아무런 결속력이 없다. 그러니 너무 자주 모이도록 강제하면 그리움의 농도가 옅어지고 쉬 식상하게 마련이다.
세 번째로는 회비의 문제다. 어떤 모임은 정기적으로 돈을 모아 부부동반 여행을 간다고 한다. 그런 모임은 이미 회원이 폐쇄된 멤버스온리 모임이다. 우리 같이 열린 반창회에서는 자칫하면 그런 회비가 갈등의 원인이 되기 십상이다. 생전 안 오던 동창생이 여행 간다니까 회비 몇번 내고 따라나서도 곤란한 일이다. 꾸준히 회비 낸 사람과 차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회비 성실히 낸 사람이 여행에 못 가도 곤란하다. 회비를 돌려줄 수도 없고 안 돌려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본의아니게 돈이 모든 문제의 화근이라는 점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세운 원칙은 회비는 걷지 말자였다. 그래도 섭섭한 몇몇 친구들이 통장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긴 해서 간간이 생각나면 보내는 친구도 있었고, 이문동의 치과의사 같은 친구는 몇 년간 매달 만원씩 빠뜨리지 않고 넣는 바람에 우리들 사이에서 역시 공부 잘 하는 녀석은 다르다는 칭찬을 들었다.

 

네 번째로는 모임을 가졌을 때의 식비다. 졸업한 지 제법 시간이 경과하여 동창 가운데는 내로라 하는 기업의 임원이 된 녀석도 있고, 벤처기업을 차리거나 장사를 해서 성공한 친구도 있었다. 밥을 먹으면 당연히 한번쯤 내도 될 형편인 친구가 여럿이다.

 

하지만 나는 극구 그렇게 과용하는 것을 막았다. 그 역시도 모임을 와해하는 위험요소인 때문이다. 사실 특정인이 전체의 밥값을 내는 것은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한번 그런 식으로 얻어먹고 나면 다음 번에 누군가가 또 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다 보면 가장 편해야 할 반창회가 오히려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만다.

 

오랜 고심 끝에 내가 만든 방식은 바로 더치페이. 그날 자신들이 먹은 만큼 돈을 나눠 내는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방식이다. 우리 모임의 구성원 가운데에는 형편이 어렵거나 사업을 하다 망한 친구도 있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라도 회비는 각자 먹은 걸 내게 하는 것이 좋은 방식이었다. 최소한 자신의 음식값 낼 돈만 있으면 모임에 부담없이 나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임이 오래 지나게 되면 연락이 끊기는 친구도 있게 된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가버린 뒤 수년 간 접촉을 끊으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런 친구들조차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이런 친구를 돌아온 탕자라고 부른다. 탕자들을 위해 우리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우리가 졸업한 기수가 10기이고 13반 모임이라서 매년 10월 13일 저녁 7시에 교문 앞에서 모이기로 정해버린 것이다. 요일불문, 일기불문 연락불문이 원칙이었다. 한 마디로 하늘이 두쪽 나도 그날은 교문 앞에 가면 동기생을 만날 수 있게 해놓았다. 그러면 10년이 지난 뒤에도 친구들이 그리우면 그날 그 시간에 교문 앞에서 보고팠던 얼굴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세심히 정성껏 키워온 반창회에서 지난 해에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저 만나 얼굴이나 보고 웃고 떠들 게 아니라 뭔가 좋은 일 좀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모교의 교장선생님께 문의한 결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사람이 만원씩만 매달 모아 200만원의 장학금을 만들어 주면 아주 큰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그 금액이 요즘 고등학생 한 사람의 1년치 등록금이란다.

 

그 정도라면 20여명이 모이는 우리 반창회가 부담없이 만들 수 있겠다 싶어 모금이 시작되었다. 통장번호를 알려주고, 기한을 정해 형편껏 돈을 보내라고 모두에게 통지해 놓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을 수가 없는 듯했다. 지난 송년회 때 이런 취지를 알려주며 통장 번호 적은 종이를 배포했는데 그 가운데 한 녀석이 내 눈 앞에서 그 종이를 구겨 버린 거였다. 친구들의 만류로 일촉즉발까지 갔던 상황이 넘어가게 되었지만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이런 꼴을 당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튼 그리하여 장학금을 모았는데 여론은 조용히 소리 없이 전달하자는 의견이 대세여서 모교 통장으로 입금하고 말았다. 물론 교장선생님께서 친히 모금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치하하는 보람도 느꼈다.

 

얼마 전 자연산만 취급한다는 횟집으로 한 동창생이 나를 초대했다. 안내문을 구겨버린 녀석에게 아직도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나에게 녀석이 한 말은 이거였다.

 

"야야, 그 녀석 너무 미워하지 마라. 우리가 늙으면 그런 녀석도 불러다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그렇다. 그 말이 내게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친구는 그저 늙어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때 최소한 함께 놀 수 있는 존재이면 되지 않는가.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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