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를 만든 것 8할은

왕꼬장 2008. 9. 24. 10:58

                                                            나를 만든 것 8할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늘도 나는 머리맡에 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영림 카디널)를 펼친다. 매일 한 챕터씩 읽는데 20여분이 걸린다. 자리에서 빠져 나와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에는 어제 읽다 만 <고구려사 연구>(사계절)가 변기 물통 위에 얹혀져 있다. 화장실에서 오래 책을 읽으면 좋지 않다고 해서 아주 조금씩 읽는다.

 

아침밥을 먹으면서는 식탁 옆에 둔 시집 <가난한 천사>(시와 시학)를 뒤적인다. 친한 시인의 시집인데 좋은 구절이 있으면 내 글에 인용하려고 어제부터 보는 중이다.

 

식사를 마친 뒤 요즘 자주 있는 전국 각지의 강연요청에 응하려고 차에 오르면 어김없이 옆 자리에는 책 몇 권이 있다. <장기려 그 사람>(홍성사), <콜린 파월 자서전>(샘터) 등. 자동차나 비행기 등으로 이동하다가 짬짬이 시간이 나면 읽는 책들이다. 

 

요즘은 노안이 와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글씨를 읽기가 어렵다.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은 많은데 벌써 몸이 도와주지 않아 속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한글을 깨우친 건 5세 무렵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데리고 있던 부하 장병 가운데 한 사람이 매일 와서 나에게 가정교사 노릇을 해준 덕분이다. 돌 무렵 걸린 소아마비로 밖에 잘 돌아다니지 못하는 어린 나에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대문 밖에서 또래 꼬마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뛰어 놀 때 나는 방안에서 책을 읽었다. 책 안에 우주가 있었기에 나는 늘 즐거웠다. 때로는 미시시피강을 톰 소여와 함께 뗏목을 타고 흘렀고, 가끔씩 달타냥과 더불어 파리의 뒷골목을 말 타고 달렸다. 그러다가도 휙 날아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 옆에서 고독을 씹었고, 에이허브 선장의 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모비 딕을 쫓았다.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갈 무렵 나는 이미 시중의 동화책을 거의 다 섭렵했다. 읽고 또 읽어 책 내용을 아예 외우다시피 했다. 지금도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로 시작하는 퀴리 부인의 첫 장면을 외울 정도이니 말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가나다라마바사'였다. 이미 수백 권의 동화책을 읽은 나에게 가에다 기역 하면 각이라고 소리쳐 외우는 수업이 즐거울 리 없었다. 학교 공부라고는 한 적도 없었지만 늘 성적은 전과목 만점이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강연 요청을 받아 가면 이런 이야기를 재미삼아 하는데 듣는 아이들은 무척 신기해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신들은 학원에 과외에 시달리며 공부해도 벅찬데 공부 하나 하지 않고도 성적이 좋았다니.

 

그 모든 이유는 바로 독서였다. 책의 세계는 교과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깊고 넓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시중의 책을 거의 다 읽어버려 더 이상 사줄 책이 없어진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의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 읽으라고 주셨다.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셰익스피어 전집, 박종화, 이광수 전집 등…….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모든 책들을 읽어버린 나는 이미 조숙한 아이로 변해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소설가가 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공계로 진로를 정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왠지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퇴폐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원하는 의대 진학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장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의대뿐만 아니라 공대, 자연계, 그 어느 곳도 장애인의 진학이 불가능했다. 실험, 실습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절하고 있을 때 고3 담임 선생님께서 길을 일러주셨다. 그건 바로 이과가 안되면 문과로 가면 된다는 거였다.

결국 내가 들어온 과는 국문과. 원한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던 학과였다. 학교에 들어와 보니 국문과는 별명이 굶는 과란다. 어이가 없었다. 문학을 전공해서 직업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르게 되는 법이라고.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국문과에 딱 맞는 학생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작가가 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운의 삶을 살고 있다. 이 모든 행운과 보람의 바탕에는 책을 좋아하던 기질이 자리잡고 있다.

강연 장소에 도착해서도 남는 시간에 가져간 책을 읽는다. 자리를 잡고 앉아 가방에 넣어간 솔제니친의 소설 <암병동>(일신서적)을 꺼내 읽는다.

 

강연을 통해 나의 삶과, 장애인의 문제,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자리에 누우면 저녁에 읽기 좋은 책, <선택의 길>(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하루의 삶을 반성한다. 물론 옆에는 내일 아침에 읽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새로운 날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얌전히 기다린다.

 

책과 더불어 깨어나고 책과 더불어 잠드는 나의 하루가 이렇게 저문다.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의 8할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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