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바다로 가는 기차

왕꼬장 2008. 9. 24. 10:54

                                       바다로 가는 기차

                                 

 

 

"학상. 이 기차 마산 가는 거 맞수?"
"네. 할머니."

 

만수는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끊으며 뒷자리의 노파에게 대거리를 했다. 두 사람이 바로이어서 표를 샀기에 자리도 옆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표를 들고 개찰구를 지나 플랫홈에 서니 이미 기차는 들어와 있었다. 마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였다.
12월의 찬 바람은 철로 위로 스산하게 불어 옷깃을 집요하게 헤치며 파고들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밖에 서 있을 이유는 없었다.
객차에 오른 만수는 번호를 찾아 자리잡은 뒤 품고 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잠시후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옆자리에 앉아야 할 할머니는 올라오질 않았다. 이렇게 움직이는 기차에 노인네가 오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수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쓰여 창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플랫홈엔 전송객들 뿐이었다.

 

"실례해요."

 

긴 부츠를 신은 아리따운 생머리의 아가씨가 만수의 옆자리에 앉은 건 그때였다.

 

"어, 이 자리는……."

 

만수가 입을 열자 아가씨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표를 내보였다. 옆자리가 맞았다.

 

"아까 할머니가 표를 사셨는데……."
"우리 엄마에요."
"네."

 

기분 나쁠 리 없었다. 긴 여행을 아리따운 여자와 나란히 앉아 여행하는 것이.
만수는 읽던 책에 다시 주의를 집중했다. 하지만 여자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는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 릴케 읽고 있네요?"

 

여자는 만수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보더니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네."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문학 좋아하나 봐요. 그 책 나도 읽었어요."

 

릴케가 파리에서 생활하며 느낀 절망과 고독의 기록인 <말테의 수기>를 여자는 읽었다고 했다. 조숙한 문학소년 만수는 이미 이 책을 두 번째로 읽는 중이었다. 시인으로 다듬어져 가는 릴케의 내면을 유추할 수 있어 좋았다.

 

"그 책 어디가 좋아요?"
"꼭 제 얘기 같아요."
"어머, 그럼 글써요? 습작하나보죠?"
"네. 시를 조금……."
"나도 여학교때 문예부였어요."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두 사람인지라 차창 밖으로 눈발이 날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동서 고금의 시, 소설, 그리고 책 이야기가 너무도 감미로웠다. 자칫하면 지루할 뻔한 여행이 유쾌한 낭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마산엔 무슨 일로 가?"

 

지나가던 홍익회 직원에게서 김밥과 사이다를 사주며 어느새 여자는 만수에게 반말을 했다.

 

"그곳 대학의 문학 동아리에서 초청을 받았어요."
"대학생이 고등학생을 초청한단 말야?"
"네."
"어머 정말 대단한 시인인가 봐. 그런 일 흔치 않은데."
"옆집 사는 대학생 형이 거기 학교 다녀요."

여자는 만수가 다시 보였다. 

"쓴 시 있으면 한 수만 낭송해줘 봐."

쑥스러웠지만 음식도 얻어먹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 암기하고 있는 자신의 시 가운데 가장 짧은 걸로 기억을 되살렸다.

 

"시라는 시에요."
"제목이 시야?"
"네."

 

방바닥에 내 폐를 토해 놓았다

피가 흥건이 고인다
흐린 전등불 밑에서
연필을 들었다
시는 내내 등을 돌리고 서있다

 

어린 나이지만 만수는 이미 시 한 편 쓰는 고통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에 그런 감상을 압축해 쓸 수 있었다.

"어머, 정말 가슴 찡해."

여자는 감수성이 예민했다. 만수는 내친 김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시상을 적어 놓은 수첩을 꺼내 몇 편의 시를 더 읊었다.
삼랑진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마산까지 간 두 사람은 바닷가를 함께 거닐었다. 바다를 향해 창을 낸 수많은 다방 한 군데에 들어가 차를 마시고 나와 겨울바람에 긴 머리를 흩날리며 여자는 만수에게 전화번호 적은 종이를 건넸다.

"내일 행사 끝나면 연락해."

여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만수는 수첩을 꺼내 떠오르는 시상을 끄적였다.

 

나 쓸쓸할 때 벼랑에서 밀어다오

 

 

군인들이 탱크를 끌고 서울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대문짝 만하게 1면을 장식한 신문을 발치에 걸어 놓고 바닷바람은 만수가 손에서 놓아버린 여자의 메모지를 허공에 말아 올리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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