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시인의 마을

왕꼬장 2009. 5. 2. 08:02

        시인의 마을
                                                                     

 

일년이면 여러 번 김차장은 시인이 된다. 시에는 재주가 하나도 없으면서 그렇게 되는 이유는 집안의 각종 기념일 때문이다. 결혼기념일과 크리스마스, 혹은 생일 같은 때 써야 되는 카드가 주범이다.

 

우리 막내딸은 옹달샘
온 집안 식구들이 목마를 땐
와서 한 모금씩 축이지요
막내가 주는 달콤한 옹달샘 물은
사랑과 평화를 주는 고귀한 선물

 

생일날 선물과 시가 적힌 카드를 받은 막내딸은 생글생글 웃었다.

"아빠는 꼭 시인 같아요."

그날 생일파티를 끝내고 김차장 가족은 케잌을 한가운데 놓고 대화를 나눴다.

"시를 몇 수 외워 가지고 낭독하면 여자들이 좋아해."
"기타 치고 노래해야 좋아한다면서요?"
대학생 아들이 물었다.
"아, 물론 기타 치고 노래해도 여자들이 좋아하지. 하지만 그걸 못하면 또 시도 한 편 낭송할 줄 알아야 해. 그래, 좋은 생각이 났다. 우리 즉흥 시대회를 한번 열어볼까?"

그래서 김차장의 집에서는 때아닌 백일장이 열렸다. 모두들 종이 한 장씩을 앞에 놓고 시상에 들어갔다.
"아빠, 시는 어떻게 쓰면 되요?"
김차장은 초등학생 막내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노래처럼 쓰면 돼. 시인들의 시는 나중에 노래가 되기도 하거든."
"아, 알았어요."

그래도 다들 교과서에서 배운 가락들이 있어서인지 나름대로 열심히 몰두하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각자 쓴 시들을 읊어보게 되었다.

김차장은 아내에 대한 짧은 사랑을 노래하기로 했다. 뭐니뭐니 해도 아내에게 잘 보이는 것이 가정의 평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딱 하나씩 있는 법
그 사랑을 나는 당신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줄 사랑이 없습니다
두 개의 사랑을 가진 당신 부럽습니다

 

"우헤헤헤!"
아이들은 김차장의 시낭송을 듣고 배꼽을 잡았다.
"엄마는 엄마 사랑 누구 줬어요?"
"몰라, 비밀이야."
아내는 비밀이라며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건축학을 전공하는 아들의 차례가 되었다. 녀석은 씩 웃으면서 시에 대해 설명을 했다.

"저는 전공에 관한 시를 써 봤어요."

 

사람들은 위로 위로 위로만 건물을 짓는다
교수님은 역발상이 중요하단다
디자인은 남과 다르게 하는 것
나는 땅속으로 깊이깊이 건물을 지어볼까

 

"와! 좋은 걸."
가족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자 고교생인 큰딸 차례였다.

"저는 이빨에 대해 썼어요."
딸의 꿈은 치과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넓적한 앞니는 이빨 집안의 대표다
환하고 잘생긴 얼굴
굵직한 어금니는 이빨 집안의 살림꾼
어떤 음식이든 갈아서 부드럽게 만든다
앗, 질긴 소갈비가 들어왔다.
걱정하지 마.
싸움꾼인 송곳니가 나서서 물어뜯고 찢고 씹었다.
송곳니가 있기에 다른 이빨들은 싸울 일이 없다

 

그때 아내가 딸에게 물었다.

"너 어금니가 영어로 뭔지 알아?"
"몰라요."
"맞았어. 몰라야, 몰라. MOLAR. 우리 어렸을 때 애들이 영어로 어금니가 뭐냐고 물으면 몰라 그러지. 몰라가 맞는 거야. 호호호!"
"정말이에요? 하하하!"

한 바탕 웃고 나자 드디어 막내 딸의 차례가 되었다.

"저는요, 노래가 되는 게 시라고 해서 그렇게 썼어요."
"그래, 뭐라고 썼는데?"
막내가 정색을 하고 자신이 쓴 시를 읽기 시작했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나는 돌겠어, 정말 돌겠어
날 사랑하는 태준이가 민지를 바라보면
나는 미치고 돌겠어
너의 얼굴을 뜯어놓을지도 몰라
나에게로 돌아와 태준아 돌아와

 

 

시를 듣던 김차장의 가족들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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