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왕꼬장 2009. 5. 2. 07:59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잘 아는 지인 가운데 시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15년 전에 첫 시집(詩集)을 낸 뒤 아직까지 후속 시집을 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안 펴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위 사람들이 왜 시집을 내지 않느냐, 어서 내라, 기대 된다 등의 말로 채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시인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합니다. 다들 내는 시집을 자신까지 왜 내야 하느냐고.

 

이처럼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으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됩니다. 시인이니 당연히 시집을 내고 싶으리라는 통념을 그는 여지없이 깨는 겁니다.

 

물론 시집을 내고 안 내고는 시인의 자유입니다. 그도 역시 언젠가 시집을 낼 것이지만 시인이면 시집을 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그는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 내야 하느냐는 물음으로 자신의 본분을 좀 더 깊이 성찰할 게 분명합니다.

 

바쁜 현대생활은 왜 하느냐? 왜 가느냐? 왜 오느냐? 같은 근본적이고 유치한 질문을 차단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동안 이 길을 왜 가야하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망각하게 되는 겁니다.

 

공무원이 왜 국민의 충복인지 곰곰이 생각을 했다면 최근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재난이나, 기초학력미달 학생수 조작 같은 사건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고위 관료가 왜 그런 지위를 누리는지 왜라는 의문을 품는다면 작금의 우리 정치계와 지도층의 추태는 줄어들 것입니다.

 

이 왜라는 질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진정한 행복을 찾는 끊임없는 자기 보정(補正)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학원을 몇 개씩 보내며 쉴 틈을 주지 않고 자녀를 돌리는 부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싫다는 아이를 괴롭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모는 이 땅의 여느 부모처럼 대답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중에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왜 아이의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왜 무시하느냐고. 왜 남들 다 간다고 우리 애도 덩달아 학원으로 가야 하느냐고. 결국 그들은 거듭되는 나의 왜에 변변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고, 내일이 행복해야 모레도 행복하기에 언젠지 모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말살하면 안됩니다. 왜 자신들이 아이를 학원으로 돌려야 하고, 왜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고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지 그부모는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타성의 동물입니다. 자기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는 뉴턴의 법칙 가운데 하나로 관성의 법칙이라 불립니다. 서 있는 물건은 계속 서 있으려 하고, 움직이던 물건은 계속 움직이려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우주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왜 모든 서 있던 물건들은 계속 서 있어야 하고, 왜 움직이던 물건은 계속 움직여야 합니까? 나의 삶의 방식 나의 삶의 궤적, 이 모든 것에 다시 한번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 보다 깊은 깨달음과 잊고 있던 정체성의 확인이 가능해질 거라 믿습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게 되고, 변화를 꿈꿀 수 있습니다.

 

경제난으로 전세계가 위기에 빠진 이 시기, 과연 나는 나의 고통과 나의 어려움은 너무 관행적이고 너무 관성적인 것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초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라고 물을 수 있는 동물은 지구상에 인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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